
올해 1월 한국액셀러레이터협회가 국내 스타트업 액셀러레이터(AC, 창업기획자) 375개사를 대상으로 진행한 설문 결과에 따르면, 2023년 초기 창업투자 산업이 어려울 것이라고 전망한 응답자가 83%(112명)에 달하는 것으로 집계됐다. 반면 전망이 좋을 것이라고 응답한 AC는 9.6%(13명), 전년과 같을 것이라는 응답은 7.4%(10명)에 그쳤다.
이 같은 양상은 공급망 불안, 우크라이나 전쟁 등에 따른 물가상승 압력으로 지난해 하반기부터 우리나라 경제에 고물가·고금리 현상이 발생하면서 벤처투자 시장까지 악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초기 스타트업의 투자는 이른바 '데스밸리(Death Valley·죽음의 계곡)'라고 불릴 만큼 쉽지 않은 것이 현실인데, 지금처럼 금융시장이 얼어붙게 되면 스타트업의 투자 재원 확보는 더욱 어려워지기 마련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최근 미국의 벤처캐피탈 및 기술 스타트업 전문은행인 SVB(Sillicon Valley Bank)가 무너지면서 투자자들이 스타트업 투자를 꺼릴 것이라는 우려도 높아졌다. 위험자산 투자를 줄이는 분위기가 고조될 경우 가장 먼저 성장기업에 대한 투자가 줄어들 것이라는 분석이다. 한 AC 대표는 "벤처투자 시장에서 지금과 같은 분위기가 지속된다면 올해를 넘기지 못하는 기업들을 줄줄이 보게 될 것"이라고 전망하기도 했다.
AC "초기 창업기업 의무투자 비율 낮추고 모태펀드 예산 늘려야"

이 같은 상황에서 국내 AC는 초기 창업기업에 대한 의무투자 비율을 완화하고 전용 모태펀드를 지속 확대함으로써 투자 생태계를 활성화시켜야 한다는 목소리를 냈다.
AC는 스타트업에 대한 전문 보육·투자 등을 수행하는 기관으로, 법인 등록일로부터 3년이 되는 시점까지 전체 투자 금액 대비 '초기 창업기업 의무투자 비율'이 40% 이상이어야 한다. 「벤처투자법」에서 정의하는 초기 창업기업은 사업 개시일로부터 3년 미만의 법인 또는 개인사업자 중소기업으로, 전체 투자금액이 300억 원인 AC라면 이 중 120억 원을 초기 창업기업에게 투자해야 한다는 뜻이다. 더불어 AC가 운용하는 개인투자조합이라면 의무투자 비율은 50% 이상까지 높아진다.
AC는 해당 조건의 초기 창업기업 중 40~50%에 육박하는 의무투자 비율을 감당할 만큼의 가치가 높은 곳이 많지 않다는 설명이다. 유망한 기술력을 갖춘 스타트업을 성장시켜 투자금을 단기 회수함으로써 재원을 확보, 창업투자 시장의 선순환을 유도해야 하는 상황에서 의무투자 비율 규제는 안정적인 포트폴리오 구축에 걸림돌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에 더해 정부의 모태펀드 예산은 나날이 줄어들고 있다. 지난 1월 4일 중소벤처기업부는 모태펀드 예산 3135억 원 중 1835억 원을 출자해 2800억 원 규모의 벤처펀드를 조성하겠다는 내용이 담긴 '모태펀드 2023년 1차 정시 출자 공고'를 발표한 바 있다.
벤처펀드의 65%가 모태펀드로 이루어졌다는 것은 그만큼 민간 출자자들의 참여가 저조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앞서 2022년 1차 정시 출자에서는 1조 3천억 원 규모의 벤처펀드가 조성됐으며 이 중 민간 출자금은 9481억 원으로 72%, 모태펀드 출자는 3700억 원으로 28%를 차지했다.
벤처투자 업계에서는 정부의 모태펀드 예산 확충을 요청하고 있다. 초기 창업기업의 경우 우수한 기술력을 가지고 있어도 업력이 길지 않아 시장에 알려지지 않은 경우가 많기 때문에 스스로 투자금을 조달하기 쉽지 않다. 아울러 대부분 기술·특허 등의 무형자산을 보유하고 있어 담보를 요구하는 금융권으로부터 자금을 공급받기 어렵기 때문에 모태펀드가 확충되어야만 이들이 투자 혹한기를 이겨내고 성장할 수 있다는 의견이다.
#모태펀드
중소·벤처기업 육성을 위한 투자재원 공급, 정책적 산업 육성, 일자리 창출 등을 목표로 조성된 정부 주도의 펀드를 가리킨다. 개별 기업을 대상으로 한 직접투자가 아닌 투자조합(펀드) 출자를 통한 간접투자 형태로, 벤처캐피탈이 운영하는 창업투자조합에 정부가 투자하는 방식으로 운영된다.
2023 스타트업 투자 생태계 지원 전략
정부는 지난 9일 모태펀드 2차 정시 출자 공고를 통해 1조 4천억 원 규모의 벤처펀드를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중소벤처기업부 등 9개 부처가 협력해 모태펀드 6845억 원을 출자, 민간자금 유입을 촉진함으로써 최근 경색된 투자시장의 활성화를 도모하겠다는 계획이다.
올해 모태펀드 출자를 통한 정부의 스타트업 투자 생태계 지원 전략은 크게 ①벤처투자 촉진 인센티브 강화 ②민간 벤처모펀드 조성 ③글로벌 자본 유치 확대 ④선진 벤처금융기법 도입으로 나뉜다.
◆ 벤처투자 촉진 인센티브 강화

첫 번째 전략은 신속하게 투자를 집행한 벤처펀드 운용사를 대상으로 각종 혜택을 제공함으로써 벤처투자 시장에 활력을 불어넣겠다는 것이다.
구체적으로 투자 목표율을 달성한 벤처펀드 운용사(정부 모태펀드의 출자를 받아 결성한 모태자펀드 운용사)에게 관리보수를 추가 지급하고, 모태펀드 출자사업 선정 시 가점 부여 인센티브를 제공한다. 또한 출자자 모집이 어려운 신생 또는 중소형 벤처캐피탈 전용 모태펀드인 '루키리그'를 확대하고 모태펀드 정책 출자 비율에서 중소형 펀드의 비율을 높일 예정이다. 루키리그는 등록 3년 이내, 운용자산 500억 원 미만의 벤처캐피탈만 참여할 수 있도록 조성된 모태펀드 출자 분야를 일컫는다.
이외에도 세컨더리벤처펀드에 출자하는 사모펀드를 대상으로 한 모태펀드 출자사업을 신설하고, M&A(인수합병) 벤처펀드의 상장법인 투자 규제(현행 최대 20%)를 대폭 완화하는 등 회수시장 활성화를 위한 방안도 추진된다.
#세컨더리벤처펀드
벤처패피탈과 AC가 보유한 창업·벤처기업의 구주를 매입하거나 벤처펀드의 LP 지분을 거래하는 펀드로, 투자자금 회수에 어려움을 겪는 벤처캐피탈의 유동성을 확보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
◆ 민간 벤처모펀드 조성

두 번째 전략은 민간 벤처모펀드를 조성하는 것이다. 민간 벤처모펀드란, 국가의 정책금융 출자 없이 순수 민간 출자금으로 펀드를 조성하고 이를 스타트업에게 출자하는 민간형 재간접펀드를 말한다.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에서는 정부가 출자하는 모태펀드의 존재감이 큰 만큼, 민간에서도 정부 모태펀드 역할을 수행할 수 있도록 민간 벤처모펀드를 조성하겠다는 것이다.
글로벌 벤처 선진국인 미국이나 중국에서는 이미 민간 모펀드를 운용하며 민간의 자본을 활발하게 끌어들이고 있다. 영국 금융정보업체 프레킨에 따르면, 지난해 글로벌 민간 모펀드는 미국이 12개, 중국이 5개, 캐나다·영국·독일 등이 각 1개씩 보유하고 있으며 이들의 평균 운용 자산은 33억 5천만 달러에 이른다. 반면 한국의 민간 모펀드 수는 0개다.
이에 우리 정부에서도 올해 민간 벤처모펀드 조성이 활성화될 수 있도록 다양한 방안을 마련했다. 법인 출자자의 법인세액 공제 및 개인 출자자의 소득공제, 모펀드 운용사의 펀드 자산관리 및 용역에 대한 부가가치세 면제, 개인 출자자 및 운용사의 창업·벤처기업 주식 양도차익 비과세 등의 세제 인센티브를 지원할 계획이다.
◆ 글로벌 자본 유치 확대

세 번째 전략은 다른 나라의 자본, 즉 글로벌 자본을 유치하는 것이다. 먼저 정부 모태펀드가 해외 벤처캐피탈과 함께 조성하고 있는 '글로벌 펀드'를 올해 말까지 누적 8조 원 이상으로 확대할 계획이다. 이어 미국 중심에서 벗어나 중동, 유럽 등의 벤처캐피탈이나 자본과도 협력할 기회를 늘려가겠다는 방침이다.
이를 위해 국내 벤처캐피탈 업계가 투자한 기업을 해외 투자사들에게 소개할 수 있도록 포트폴리오 IR(기업설명회)을 추진한다. 해외 진출을 희망하는 스타트업을 현지에 파견해 이미 해외에 진출한 기업 및 해외 벤처캐피탈과의 네트워킹을 돕는 '글로벌 점프업 프로그램'도 운영할 계획이다.
유니콘 기업으로의 성장 가능성이 높은 스타트업을 대상으로 대규모 후속 투자를 하는 '글로벌 유니콘 프로젝트 펀드'도 신규 조성된다. 해당 펀드는 해외 출자자와 정부 모태펀드가 함께 조성하고, 해외 우수 벤처캐피탈사가 운용하는 구조로 설계될 예정이다.
◆ 선진 벤처금융기법 도입

네 번째 전략은 다양한 벤처금융기법을 도입해 스타트업에게 폭넓은 금융지원을 제공하는 것이다.
기업가치 산정이 어려운 초기 스타트업에게 보다 쉽게 투자할 수 있도록 '조건부 지분전환계약'을 도입한다. 이는 스타트업이 먼저 대출을 실행하고 투자 유치로 기업가치가 확정된 이후 전환사채를 발행하는 방식으로, 스타트업 입장에서는 투자를 쉽게 유치할 수 있고 투자자 입장에서는 원리금 보장이 가능하다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초기 투자 이후 후속 투자 유치까지 자금적 어려움을 겪는 스타트업의 특성을 고려해 금융기관에 신주인수권을 부여하는 조건으로 저금리 대출을 받을 수 있는 '투자조건부 융자제도'를 도입한다. 금융기관은 스타트업의 신주인수권을 담보로 낮은 금리의 대출을 진행하고, 스타트업이 후속 투자를 유치하면 해당 투자금으로 대출을 상환 받을 수 있다. 투자와 융자가 혼합된 지원방식이기 때문에 초·중기 스타트업의 수요가 높을 것으로 전망된다.
이외에도 정부는 벤처펀드가 금융기관에서 대출을 받을 수 있는 특수목적회사를 설립, 금융기관에서 들어온 자금 등으로 대규모 후속 투자가 가능하도록 유도함으로써 스타트업의 스케일업을 지원할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