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철,『스타트업 심사역의 회상』
▲고병철,『스타트업 심사역의 회상』

'스타트업'

어딘가 모르게 가슴을 짓누르는 답답함, 정신이 맑아질 것 같지 않은 이 흐릿함은 비단 나만의 것은 아닐 것이다. 스타트업 대표는 물론, 그들과 함께 호흡하는 액셀러레이터(AC)와 벤처캐피털(VC) 역시 비슷한 고민과 경험의 강을 건넌다. 대표와 투자자, 즉 '사장님과 물주' 사이에 끼어 고생하는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이 책은 일종의 위안을 건넨다.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는, 우리 모두가 같은 길 위에 서 있다는 안도감이다. 이 책은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시작한다.

책은 스타트업 생태계의 민낯을 가감 없이 드러낸다. 초기 창업 멤버 간의 지분 싸움부터 외부 투자를 유치하며 겪는 복잡한 구조 문제, 본질적인 사업 성장보다 지원 사업 수주에 귀한 시간을 허비하는 현실까지. 결국 청산의 시점에 이르러서는 저마다 다른 계산법으로 서로를 지치게 만드는 과정들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 나의 지난날을 복기하는 듯한 착각마저 든다. 사업의 내용은 제각기 달라도 그 구조는 놀라울 만큼 비슷하고, 사람은 모두 달라도 그들의 행동 습성은 익숙한 패턴을 반복하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러한 현상들이 단순히 누군가의 잘잘못 문제가 아니라고 잘라 말한다.

핵심은 '원래 그런 것'이라는 통찰이다. 스타트업의 생애주기는 마치 자연의 흐름과 같아서 억지로 만들고 부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이 책은 성공과 실패를 이분법적으로 나누는 시각에서 벗어나, 지금의 내가, 내 사업이 거대한 흐름 어디쯤에 위치해 있으며 누구와 함께하고 있는지를 매일 느끼며 나아가는 과정 자체가 스타트업의 본질이라고 이야기한다. 나 역시 깊이 동감하는 바이다. 대표의 생각과 스토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유는 결국 이 거친 흐름을 헤쳐 나갈 힘이 사업의 상세 계획서가 아닌, '왜 이 일을 하는가'에 대한 단단한 이유와 합의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결론은 결국 시장의 선택이다. 책의 후반부는 이 냉정한 진리를 거듭 강조한다. 억지로 시장을 만들고 고객을 설득하는 데 한계가 있음을 인정해야 한다. 잘 안되는 곳은 미련을 버리고 떠나고 닫을 줄 아는 용기가 필요하다. 반대로 잘되는 곳에 모여 더 잘하고, 그 성과를 함께 나누는 것이 자연스러운 생태계의 선순환이다. 억지를 부리는 순간, 흐름은 거꾸로 흐르고 모두가 고통스러워진다. 이 책은 성공한 기업의 화려한 단면이 아니라, 시장의 흐름에 순응하며 자연스럽게 생겨나고 사라져 간 수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이 법칙을 증명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기록하고 알려야 한다. 이 책이 던지는 마지막 메시지는 바로 이것이다. 잘된 이야기뿐만 아니라, 잘되지 않은 이야기 역시 알려야만 한다. 당사자에게는 뼈아픈 실패의 기록일 수 있지만, 그 경험 한 조각이 모여 생태계 전체가 더 좋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귀중한 자산이 된다. 실패를 개인의 낙오로 치부하지 않고, '원래 그런 것'이라는 큰 틀 안에서 현상으로 분석하고 공유할 때, 비로소 우리는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을 힘을 얻게 된다. 이 책은 스타트업이라는 여정의 나침반이라기보다, 오히려 그 길의 본질을 담담하게 설명하는 한 권의 지도와 같다. 또 그 지도는 우리에게 길을 잃지 않는 법이 아닌, 길을 잃었을 때조차 자신의 위치를 깨닫게 하는 지혜를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