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커피 한 잔의 선택, 그리고 디지털 헬스케어의 선택
매일 아침 카페에서 메뉴를 고르는 순간을 떠올려보자. 아메리카노는 무난하지만 밋밋하고, 라떼는 부드럽지만 칼로리가 걱정되고, 신메뉴는 궁금하지만 실패할 위험이 있다. 우리는 그날의 컨디션과 예산, 그리고 실패할 수 있는 여유를 종합적으로 고려해 선택한다. 올해 1월 24일 시행된 디지털의료제품법 앞에서 헬스케어 스타트업들이 마주한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계 최초라는 타이틀이 붙은 이 법은 혁신의 기회를 제공하지만, 동시에 누구도 가보지 않은 길이라는 불안감도 안겨준다. 커피 메뉴를 고르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고, 선택의 결과는 회사의 생존과 직결된다.
법은 있는데 설명서는 어디에?
새로운 전자제품을 샀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설명서를 찾는 것이다. 아무리 직관적으로 만들어진 제품이라도 제대로 활용하려면 매뉴얼이 필요하다. 그런데 디지털의료제품법이라는 '신제품'을 받아든 스타트업들은 지금 설명서 없는 복잡한 기계를 마주한 상황이다. 법은 제정됐지만, 실제 운영을 위한 세부 지침들은 아직 완전히 마련되지 않았다. 마치 새 스마트폰을 샀는데 '일단 전원을 켜세요'라는 기본 지시만 있고, 세부 기능 사용법은 '추후 업데이트 예정'이라고 적혀 있는 것과 같다. 이는 특히 규제 전담팀이 없는 스타트업들에게 상당한 스트레스를 준다.
경계선의 모호함과 현실적 과제
스타트업들이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경계선의 모호함'이다. 자신들의 제품이 기존 의료기기법과 새로운 디지털의료제품법 중 어느 것을 적용받아야 하는지 명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 전문가들조차 디지털의료제품법에 대해 학습 중이며, 외부 컨설팅 비용은 예상보다 높아지고 있는 현실이다.
하지만 모두가 동일한 환경에 놓여 있지는 않으며, 자본력이나 네트워크 등에서 차이가 존재한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법 시행과 함께 스타트업들이 직면한 새로운 과제들도 만만치 않다. 무엇보다 인허가 전문성의 내재화가 시급하다. 임상시험 설계, 품질관리시스템(QMS) 구축, 사이버보안 관리 등 규제 대응 역량이 필수적이지만, 창업 초기에는 전문 인력 확보가 어려워 외부 컨설팅에 의존할 수밖에 없고 이는 추가 비용 부담으로 이어진다.
데이터 거버넌스 체계 구축도 새로운 진입 장벽이다. 환자 데이터 보호와 관련해 엄격한 기준이 요구되며, 이를 위한 시스템 투자와 전문 인력 확보가 필수다. 또한 국내 시장만으로는 성장에 한계가 있어, 미국 FDA·유럽 MDR 등과의 글로벌 규제 호환성 확보를 포함해 각국 규제 환경에 대한 전략적 접근이 필요하다.
변화 속 기회와 실전 전략
이런 변화는 투자 생태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벤처캐피털(VC)들은 장기적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도 단기적으로는 신중한 태도를 보인다. 다만, 이런 신중함이 기회의 문을 닫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준비된 스타트업들에게는 차별화된 경쟁 우위를 만들 수 있는 골든타임이 되고 있다. 많은 기업이 관망하는 사이, 용기 있게 먼저 나선 기업들은 시장을 선점해 나가고 있다.
디지털의료제품법을 기회로 삼아 성공적으로 도약한 스타트업들의 사례를 보면, 제품 기획 단계부터 규제 요구사항을 꼼꼼히 검토해 비즈니스 모델을 설계했고, 의료기관, 제약회사, 규제 전문 기업들과 전략적 파트너십을 구축해 시너지를 창출했다. 대형 병원과의 협업을 통해 임상 데이터 확보와 실증 검증을 동시에 해결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코스닥 상장을 준비하는 헬스케어 스타트업들에게도 디지털의료제품법은 중요한 변수가 됐다. 증권사 IPO 심사 과정에서 '규제 대응 역량'이 점점 더 중요한 평가 요소로 부각되고 있으며, 최근 상장한 헬스케어 스타트업들의 투자설명서에는 규제 대응 현황과 계획이 구체적으로 기술되고 있다. 이는 투자자들이 헬스케어 스타트업의 지속가능성을 판단할 때 규제 리스크를 중요하게 고려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현실적인 생존 전략과 앞으로의 분기점
현재 상황에서 스타트업들이 취할 수 있는 가장 현실적인 접근법은 우선 자사 제품이 어떤 규제 카테고리에 해당하는지 파악하고, 애매한 경우 식약처 사전상담을 적극 활용하는 것이다. 한 번에 모든 것을 완벽하게 해결하려 하기보다는 기존 틀에서 가능한 부분부터 시작하고, 새로운 세부 기준이 나오면 추가로 대응하는 점진적 접근이 효과적이다.
내부 역량만으로는 한계가 있으므로, 규제 전문 컨설팅이나 법무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도 반드시 고려해야 한다. 초기 비용이 부담스럽겠지만, 이는 시행착오를 줄이고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기 위한 필수 투자다. 또한 의료기관, 제약사, IT 기업 등과의 협업을 통해 임상 데이터 확보와 실증 검증, 글로벌 진출의 발판을 마련하는 것도 중요하다.
업계 전문가들은 향후 6개월을 디지털의료제품법의 구체적인 모습이 드러나는 중요한 시기로 보고 있다. 이 시기를 어떻게 준비하고 대응하느냐에 따라 스타트업들의 향후 경쟁력이 크게 달라질 것이다.
불확실성을 기회로 바꾸는 지혜
디지털의료제품법 시행 5개월, 우리는 여전히 기대와 우려가 공존하는 전환기에 있다. 하지만 이런 불확실성은 '준비된 불확실성'으로 만들 수 있다. 시행착오는 불가피하지만, 이를 통해 얻게 될 경험과 노하우는 향후 글로벌 시장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발휘할 것이다.
지금은 선제적 대응을 통해 경쟁 우위를 만들어갈 수 있는 골든타임이다. 변화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스타트업들에게 새로운 성장의 기회가 열려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인내심을 갖고 차근차근 준비해나가는 지혜와 실행력, 그리고 명확한 목적의식이다. 커피 한 잔을 마시는 이유를 분명히 하는 것처럼, 우리가 이 여정을 떠나는 이유를 명확히 해야 한다. 그래야 어떤 불확실성이 찾아와도 흔들리지 않고 목표를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