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제는 병원에서 AI가 판독한 진단 결과를 받는 게 낯설지 않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의료 현장에서 인공지능이 내린 진단을 직접 마주하는 일은 미래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지금은 AI 진단, 디지털치료기기, 웨어러블 건강기기가 우리 일상 속 의료 풍경이 됐다. 의료와 기술의 경계가 빠르게 허물어지는 이 시대, 법과 제도 역시 더 이상 과거의 옷을 입고 있을 수 없다.
혁신은 빠르고, 제도는 느렸다.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은 그야말로 '폭풍 성장' 중이다. 시장에는 매달 새로운 AI 진단기, 디지털치료기기, 건강을 관리해주는 앱과 웨어러블 기기가 쏟아진다. 하지만 이 혁신을 뒷받침할 법과 제도는 한참 뒤처졌다. 기존 의료기기법과 약사법은 AI 소프트웨어나 디지털융합의약품처럼 '경계가 모호한' 신제품을 제대로 품지 못했다.
이에 업계에서는 '혁신이 규제에 발목 잡힌다'는 우려가 커졌고, '제대로 된 안전장치 없이 시장에 나오는 건 위험하다'는 목소리도 만만치 않았다.
이런 배경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디지털의료제품법'이다.
기존 의료기기법으로는 관리에 한계가 있다는 정부와 업계의 공감대가 형성됐고, 소프트웨어 등 디지털의료기기는 전통적 의료기기 규제 체계로는 한계가 있다는 점이 반복해서 지적됐다. '디지털의료제품법'은 AI, 소프트웨어, 웨어러블, 그리고 디지털과 의약품이 결합된 신제품까지 한 번에 관리할 수 있도록 설계된 이른바 '맞춤형 규제'다. 제품 특성에 맞는 허가·심사·사후관리 기준을 마련해, 혁신의 속도를 따라가면서도 안전성을 놓치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져 있다.
특히 이재명 대통령이 강조한 '첨단 바이오·디지털 헬스케어 산업 육성' 공약과 맞물려, 이번 디지털의료제품법은 국가 차원의 신성장동력 확보와 국민 건강 증진을 동시에 추구하는 핵심 정책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대통령은 취임 직후부터 "디지털 헬스케어 규제혁신과 글로벌 경쟁력 강화"를 국정과제로 내세우며, 산업계와 의료계의 현장 목소리를 반영한 실질적 규제 개선을 약속해왔다.
여기서 주목할 부분은 '변경관리 계획' 제도다.
AI 의료기기처럼 자주 업데이트되는 제품은 사전에 변경 계획을 제출하면, 계획 범위 내에서는 별도 인허가 없이 신속히 개선할 수 있도록 문을 열었다. 이는 혁신의 속도를 높이면서도 안전성은 놓치지 않겠다는 제도적 진전이다. 또한 2026년부터는 기존에 의료기기로 관리되지 않던 웰니스, 즉 개인용 건강관리제품까지도 관리 대상에 포함된다.
그동안 웰니스 제품은 건강관리라는 이름 아래 사전 허가나 품질관리 기준 없이 시장에 유통되어 왔으나, 앞으로는 임상시험, 허가, 품질관리, 광고 등 전주기적 관리 체계가 적용된다. 이러한 변화는 소비자 안전을 강화하는 긍정적 신호임과 동시에, 업계에는 새로운 부담과 고민을 안긴다.
단순 건강 관리용과 만성질환자 자가 관리용, 그리고 질병 진단·치료와 직접 연결되는 제품을 어떻게 구분하고, 각기 다른 관리 기준을 적용할 것인가에 대한 실무적 논의가 필요하다. 실제로 위해도와 실제 사용 행태에 따라 제품을 세분화하고, 사전 허가만으로 끝내지 않고 실사용 데이터 기반의 상시 모니터링과 재평가 시스템을 구축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해외 역시 디지털의료기기 규제 혁신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
미국 FDA는 AI 기반 의료기기와 소프트웨어 의료기기에 대해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도입하고, 알고리즘의 투명성, 사후 모니터링, 데이터 무결성 확보를 강조하고 있다.
유럽연합은 2025년부터 유럽 건강데이터공간(EHDS) 규정을 시행해, 의료기기가 전자건강기록(EHR)과 연동될 때 보안, 상호운용성, 기록관리 요건을 강화했다.
WHO 역시 각국이 자국 상황에 맞는 디지털 헬스 전략을 세우되, 국제적 표준과 상호 조화를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디지털의료제품법은 혁신과 안전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한 새로운 출발점이다.
법 시행만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되지는 않는다. 이재명 대통령의 국정 과제처럼 △구체적인 가이드라인 마련 △보험 수가 체계 정비 △의료 현장과의 긴밀한 소통 △글로벌 규제와의 정합성 확보가 반드시 뒤따라야 한다.
지금이야말로 산업계, 의료계, 규제기관이 함께 현실적이고 예측 가능한 규제 체계와 글로벌 경쟁력 확보 방안을 마련해야 할 시점이며, 제도적 혁신은 디지털의료기기의 미래와 국민 건강의 새로운 기준을 만들어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