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판 인플레이션 감축법(IRA) 도입을 촉구하는 목소리가 확산하고 있다. 그동안 업계 안팎에서는 국내에 생산량 기반의 세액공제 제도가 미비해 타국과의 가격 경쟁에서 뒤쳐지고 있다는 지적이 꾸준히 제기돼 왔다. 초기 투자비와 생산비용이 높은 첨단산업의 특성을 고려해 강력한 생산 지원책을 펼치는 주요 선진국과 대비된다는 이유에서다.
국내도 통합투자세액공제를 통해 국가전략기술산업을 지원하고 있지만, 현금 보조금을 주는 미국, 중국과 달리 해당 기업이 낸 법인세에서 보조금을 빼주는 방식이다. 이에 적자기업의 경우에는 법인세가 없어 실질적인 보조금 혜택이 없다. 또 현재 설계대로 한국판 IRA가 도입된다 하더라도 국내 배터리 3사의 경우 국내 생산량이 극소량인데다, 그 마저도 대부분 수출돼 환급액은 매출액 대비 0.1%도 채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판 IRA는 국내생산 및 국내판매 분에 한해 적용되기 때문이다.
美·中 기업은 '정부 날개' 달았는데… 韓, 기업 맞춤형 지원 절실
전 세계 첨단산업 패권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각국 정부는 자국 기업 지원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미국과 중국 등 주요국은 생산량 기반의 막대한 인센티브와 보조금 카드를 통해 자국 기업이 연구개발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 조성에 앞장서고 있다.

대표적 사례로는 미국의 IRA가 있다. 미국은 2022년 8월 자국의 첨단산업 육성 및 경쟁력 강화를 목표로 IRA를 도입했다. 궁극적인 목표는 인플레이션 감축, 처방약 비용 절감, 청정에너지 활성화 및 국내 에너지 생산 투자를 통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는 것이다.
특히 미국의 IRA는 북미산 전기차 및 배터리 생산에 강력한 혜택을 제공해, 국내 전기차, 배터리, 배터리 소재·부품 기업들의 '탈(脫) 한국화'를 부추기고 있다. 구체적으로 미국의 IRA는 배터리 셀 및 모듈 생산 기업에 킬로와트시(kWh)당 각각 35달러, 10달러의 세액공제 혜택을 제공하며, 기업들은 공제액을 현금으로 환급받거나, 다른 기업에 양도할 수도 있다.
중국도 생산량 확대를 위해 대규모 보조금 지급 정책을 펼치고 있다. 미래에셋증권 보고서에 따르면, 중국의 주요 배터리 기업들은 기가와트시(GWh) 단위의 생산 목표에 따라 운영 보조금 및 생산 인센티브를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또한 중국 당국은 연구개발(R&D) 비용 추가 공제, 토지 및 금융 지원, 산업 구조조정을 통한 기술 고도화도 지원하고 있다.
국가전략연구소(CSIS)는 2009년부터 2023년까지 중국 전기차 및 배터리 제조사들이 정부로부터 2,309억 달러의 보조금을 받은 것으로 추정했으며, 추정치에 포함되지 않은 다른 유형의 지원까지 더하면 실제 지원 규모는 훨씬 더 막대할 것이라고 예상했다.
일본 역시 특정 전략분야의 국내 생산을 장려하기 위해 '전략분야 국내생산 촉진세제'를 도입했다. 이는 자국 내 핵심 산업 기반을 강화하고 글로벌 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려는 목적이다. 주요 지원 대상은 전기차 배터리, 반도체, 재생가능한 대체항공연료(SAF) 등이며, 자국에서 생산된 제품 생산량, 판매량 등에 비례해 법인세액을 공제해 준다.
업계 전문가들은 "주요국들이 자국 제조업의 경쟁력을 확보하고자 강력한 생산 지원책을 펼치고 있는 상황"이라며 "한국도 첨단산업의 지속적인 성장을 위해 한국판 IRA 도입에 박차를 가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국내 배터리 3사 생산량 90% 이상은 해외 생산… 첨단산업 '탈 한국화' 이대로 괜찮을까
한국 정부의 미비한 지원책으로 국내 기업들의 '탈 한국화' 현상도 심화될 조짐을 보인다. 높은 기술력에도 불구하고 '경쟁국 대비 부족한 정부 지원'이 글로벌 경쟁력 확보의 걸림돌로 작용하자, 국내 투자 대신 해외 진출을 선택하는 기업들이 늘고 있어서다. 이는 배터리 3사의 해외 생산 비중에서도 확연히 드러난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통상연구원이 발표한 보고서에 따르면 국내 배터리 3사의 해외 생산 비중(2023년 11월 기준)은 92.4%로 집계됐다. SK온이 95%로 가장 많았고, LG에너지솔루션(91.3%), 삼성SDI(89.7%)가 그 뒤를 이었다. SK온과 삼성SDI는 헝가리와 중국 생산 비중이 70% 이상이었고, LG에너지솔루션은 폴란드와 중국에서 각각 47.5%, 38.4%를 생산했다.
여기에 2023년 11월 이후 가동을 시작한 공장과 현재 건설 중인 공장까지 모두 고려할 경우, 국내 배터리 3사의 해외 생산 비중은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먼저, SK온은 포드와의 합작법인 '블루오벌SK'를 통해 미국 켄터키주와 테네시주에 총 3개 공장(129GWh)을 건설 중이며, 미국 조지아주에 현대차와 합작 공장(35GWh)을 짓고 있다. 켄터키 1공장(2025년 가동)을 시작으로 2026년까지 순차적으로 가동할 예정이며, 공장 완공 시 미국에서만 160GWh이상의 배터리 생산 규모를 갖추게 된다.
LG에너지솔루션은 북미지역에 미시건 단독 공장과 제너럴모터스(GM)와의 합작 공장(JV1·JV2)을 운영 중이며, GM과의 JV3 증설을 비롯해 스텔란티스, 혼다, 현대차 등 주요 완성차 업체와 합작 배터리 생산공장을 건설하고 있다. 이어 지난해는 미국 애리조나주에 신규 원통형 및 에너지저장장치(ESS) LFP 배터리 생산 공장(2026년 가동) 착공도 시작했다. 투자 규모는 7조 2,000억 원에 달하며, 총 생산 능력은 53GWh다.
삼성SDI는 스텔란티스와의 합작으로 미국 인디애나주에 1공장(33GWh, 2025년 가동)에 이어 2공장(34GWh, 2027년 가동)을 증설 중이며, GM과의 합작을 통해 인디애나주에 전기차 배터리 공장(30GWh, 2026년 가동)도 짓고 있다.
한편, 대한무역투자진흥공사(KOTRA)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 전세계 84개국에 진출한 한국기업은 총 9,930곳으로 나타났다. 이 중 생산법인 비중은 28.4%에 달한다. 주요 진출지역은 동남아대양주(40.2%), 중국(24.1%), 북미(10.7%) 순이다. 반면, 정부의 다양한 장려책에도 불구하고, 복귀 기업은 매우 저조한 상황이다. 업계에 따르면 2013년부터 2024년까지 국내로 복귀한 기업은 158곳이며, 이 중 대기업은 5곳에 불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