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이앤피메디 칼럼] 디지털 임상시험 시대, 데이터 신뢰성 확보를 위한 혁신과 제도적 도약
현대 의학은 디지털 기술과의 융합을 통해 유례없는 속도로 발전하고 있습니다. 이는 곧 환자들에게 더 안전하고 효과적인 치료법을 제공하는 기반이 됩니다. 특히 임상시험 분야는 디지털 전환의 선두에 서서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있습니다. 디지털 임상시험은 단순히 종이 없는(paperless) 임상시험을 넘어, 데이터 수집, 관리, 분석의 전 과정에 걸쳐 첨단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해 효율성과 정확성을 극대화하는 임상시험입니다.
디지털 임상시험과 데이터 관리 혁신: 투명성은 글로벌 표준
디지털 임상시험의 핵심은 바로 '데이터 관리의 혁신'에 있습니다. 전자증례기록(EDC), 웨어러블 기기, 원격 모니터링 시스템 등 다양한 디지털 도구를 활용해 실시간으로 방대한 양의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석할 수 있게 되면서 그 중요성은 더욱 대두되고 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임상시험의 속도를 향상시키고 비용을 절감하는 효과 외에도 기존에는 측정하기 어려웠던 환자의 일상생활 데이터를 확보해 임상적 의미를 확보할 수 있게 합니다.
오늘날 데이터 투명성은 단순히 권장 사항이 아니라, 전 세계 규제 기관과 의료 전문가들이 요구하는 글로벌 표준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투명하게 수집되지 않은 시험 데이터는 그 어떤 혁신적인 결과라도 인정받기 어렵습니다. 국제적인 논의에서 디지털 임상시험은 '환자 중심성 강화', '데이터 수집 및 모니터링의 효율성 증대', '임상시험 접근성 향상' 등을 핵심 가치로 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국제조화회의(ICH)의 E6(R3) 가이드라인에서는 임상시험 설계 및 수행에 있어 디지털 기술의 도입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며, 데이터 품질 및 무결성 확보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도 세계 최초로 2024년 2월 '디지털의료제품법'을 제정하고 2025년 2월부터 시행함으로써 디지털 헬스케어 분야에서 규제와 관련된 선도적인 입지를 만들어나가고 있습니다. 국내 디지털의료제품법 제2조에서 디지털 의료기기는 '지능정보기술, 로봇기술, 정보통신기술 등의 첨단 기술이 적용된 의료기기'로 정의되어 있습니다. 디지털 임상시험을 통해 임상적 유효성과 안전성을 입증해 제품의 국내 인허가를 받기 위한 자료가 생성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임상시험에서 생성되는 데이터의 투명성은 이러한 법적 정의 안에서 더욱 엄격하게 요구됩니다.
데이터 신뢰성 확보를 위한 기술적·제도적 변화
"데이터 신뢰성 확보를 위해서는 기술적, 제도적 변화가 동시에 이루어져야 합니다"
기술적 변화는 임상시험 자료 수집에 적용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분산형 임상시험(Decentralized Clinical Trials, DCT)에서는 스마트워치, 스마트패치 등 웨어러블 기기를 활용해 환자의 심박수, 활동량, 수면 패턴 등 생체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수집합니다. 또한 원격 환자 모니터링(Remote Patient Monitoring, RPM) 시스템을 통해 환자의 혈당, 혈압 등 건강 데이터를 자동으로 기록하고 전송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기술들은 데이터의 정확성과 즉시성을 높일 뿐만 아니라, 수동 기록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오류를 최소화해 데이터 신뢰성을 향상시킵니다. 블록체인 기술 역시 임상시험 데이터의 위변조를 방지하고, 데이터의 생성부터 보관, 활용까지 모든 이력을 투명하게 기록해 데이터 무결성을 보장하는 데 활용될 수 있습니다.
제도적 변화에는 각국 규제 기관의 역할이 더욱 중요해지고 있습니다. 디지털 임상시험 환경에 맞는 새로운 규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고, 데이터 신뢰성을 확보하기 위한 구체적인 절차와 기준을 마련해야 합니다. 미국 FDA는 디지털 헬스 기술의 발전에 발맞춰 여러 가이드라인을 발표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2020년에 발족한 'Digital Health Center of Excellence(DHCoE)'는 디지털 헬스 제품의 개발 및 규제 승인을 지원하며, 'Software as a Medical Device(SaMD)' 관련 가이드라인을 통해 소프트웨어 의료기기의 안전성 및 유효성 평가 기준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또한 '21 CFR Part 11'은 전자 기록 및 전자 서명의 유효성을 인정하는 미국 연방 규정으로, 디지털 임상시험 데이터의 전자적 기록과 관리에 대한 신뢰성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국내에서는 2024년 2월에 제정돼 2025년 2월부터 시행 중인 디지털의료제품법은 디지털 의료제품의 개발부터 허가, 생산, 판매 및 사후관리 전반에 걸친 안전 및 품질 관리의 기준을 마련했습니다. 특히 이 법은 소프트웨어 의료기기의 특성을 반영해 인허가 절차를 간소화하고,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고려한 변경관리 계획 조항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선제적인 법 제정을 통해 디지털 기술의 빠른 발전 속도를 규제가 따라잡지 못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습니다.
디지털 임상시험 관련 실제 적용 사례
실제 임상시험 현장에서는 디지털 기술이 다양하게 적용되고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모더나(Moderna)의 COVID-19 백신(mRNA-1273) 개발은 신약 개발 과정에서 분산형 임상시험(DCT) 방법을 채택해 혜택을 본 가장 유명한 사례입니다.
모더나는 COVID-19 대유행이라는 전례 없는 상황 속에서 임상연구의 효율화와 가속화를 위해 클라우드 기반 임상 솔루션을 제공하는 '메디데이터(Medidata)' 기업의 서비스를 적극 활용했습니다. 특히 EDC(Electronic Data Capture, 전자 자료 수집)를 통한 데이터의 신속한 수집, eCOA(Electronic Clinical Outcome Assessment, 전자 임상 결과 평가)를 활용한 환자 중심의 결과 평가, 그리고 CSA(Central Statistical Analytics, 위해성 기반 모니터링 솔루션)를 통한 효율적인 모니터링을 통해 임상시험 대상자를 빠르게 모집하고 관리할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모더나는 짧은 시간 안에 백신 개발을 완료해 전 세계적인 팬데믹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응하는 데 크게 기여했습니다. 디지털 임상 솔루션의 활용으로 신약 개발의 속도와 효율성이 혁신적으로 향상될 수 있음을 보여준 사례입니다.
글로벌 헬스케어 기업 글락소스미스클라인의 PARADE(Patient Rheumatoid Arthritis Data from Real World) 연구도 DCT를 활용한 사례입니다. 스마트폰을 활용해 신체 기능(physical function)과 관련된 정보를 원격으로 수집해 환자들의 임상시험 참여 부담을 줄이고, 임상시험 기간과 비용을 효율화했습니다.
미국 FDA의 PCCP 제도와 국내 디지털의료제품법의 '변경관리 계획' 조항
미국 FDA의 PCCP는 인공지능 및 머신러닝(AI/ML) 기반 의료기기(SaMD)에 대한 변경 관리 계획(Predetermined Change Control Plan) 제도입니다. 2024년 FDA가 발표한 가이드라인을 확정한 이 제도는 머신러닝 기반 SaMD 출시 후에도 지속적으로 학습하고 성능이 개선될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이러한 변경사항을 사전에 계획하고 관리하는 것을 허용합니다. 즉, 제조사가 사전에 변경관리 계획을 수립하고 FDA의 승인을 받으면, 사소한 변경사항 발생 시 매번 새로운 인허가 절차를 거치지 않고도 제품을 업데이트할 수 있습니다. 이는 혁신적인 디지털 의료기기의 신속한 시장 출시와 지속적인 성능 개선을 가능하게 합니다.
PCCP가 적용된 구체적인 사례로는 2022년 9월에 FDA 승인을 받은 'Caption Interpretation Automated Ejection Fraction Software'가 있습니다. 이 소프트웨어는 방사선학 기계학습 기반 정량적 영상 소프트웨어로, 심장 박출률(Ejection Fraction)을 자동으로 측정하고 해석하는 AI 기반의 솔루션입니다. 21 CFR 892.2055 규정(제품 코드: QVD)에 따라 Class II 의료기기로 분류된 이 제품은 그 기능적 특성상 AI 모델의 지속적인 학습과 업데이트가 필수적이며, FDA는 이를 PCCP 제도를 통해 관리하도록 허용했습니다. 이는 AI 기반 영상 진단 소프트웨어의 성능 개선 및 확장에 있어 PCCP 제도가 실질적인 인허가 효율성을 제공함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국내 디지털의료제품법과 PCCP 제도의 차이점
국내에서는 2025년 2월 시행된 디지털의료제품법 시행규칙에 '변경관리 계획' 조항이 포함돼 있습니다. 구체적으로는 디지털의료제품법 시행규칙 제7조에서 변경관리 계획서의 추가 제출에 대해 명시하고 있습니다. AI 학습 데이터의 변경이나 소프트웨어의 버그 수정 등 경미한 변경에 대해 별도의 허가 없이도 업데이트가 가능하도록 한 것입니다.
그러나 국내 디지털의료제품법의 '변경관리 계획' 조항은 FDA의 PCCP 제도와 비교했을 때 몇 가지 차이점이 존재합니다. PCCP는 인공지능 및 머신러닝 기반의 특성을 고려해 학습 데이터의 변화, 알고리즘의 업데이트 등 예측 가능한 변경 사항에 대한 상세한 관리계획을 요구합니다. 어떤 종류의 데이터가 추가될 수 있는지, 알고리즘은 어떤 방식으로 개선될 것인지, 그리고 이러한 변경이 제품의 성능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과 검증 방법을 제시해야 합니다.
반면, 국내 법규의 '변경관리 계획'은 아직 PCCP만큼 구체적인 데이터 기반의 변경관리 원칙과 검증 방법에 대한 세부적인 가이드라인이 부족한 실정입니다. 즉, 어떤 변경이 허용되는지, 그 변경이 제품의 안전성과 유효성에 미치는 영향은 어떻게 검증할 것인지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상대적으로 덜 명확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불명확성은 기업 입장에서는 예측 가능성을 저해하고, 규제 기관 입장에서는 일관성 있는 심사 기준을 적용하기 어렵게 만들 수 있습니다.
디지털 의료 혁신을 위한 제도적 보완의 제언
대한민국 식품의약품안전처는 세계 최초로 디지털의료제품법을 제정하고 시행하는 등 디지털 헬스케어 산업의 발전을 위한 선도적인 노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이러한 선제적인 규제 환경 조성에 깊은 감사를 표하며, 필자는 현행 법규의 실효성을 더욱 높이고 미래 의료 혁신을 가속화하기 위한 몇 가지 보완 사항을 제언하고자 합니다. 특히 AI 기반의 디지털 의료기기가 끊임없이 진화하고 학습하는 특성을 고려할 때, 변화를 예측하고 관리하는 체계적인 가이드라인은 필수적입니다.
국내 변경관리 계획 조항에 반영돼야 할 구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머신러닝 기반 제품의 학습 데이터 변경에 대한 구체적인 기준이 필요합니다. 예를 들어, 어떤 조건에서 새로운 학습 데이터를 추가할 수 있는지, 추가되는 데이터의 양과 질은 어떻게 관리할 것인지, 그리고 이러한 데이터 변화가 제품의 성능에 미치는 영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상세한 가이드라인이 필요합니다.
둘째, 알고리즘 업데이트에 대한 명확한 기준을 제시해야 합니다. 경미한 변경과 추가적인 심사를 요구하는 중대한 변경을 구분하는 상세한 기준이 마련돼야 합니다.
셋째, 변경사항의 검증 방법에 대한 상세한 지침이 포함돼 합니다. 변경된 제품의 안전성 및 유효성을 어떻게 재검증할 것인지, 어떠한 임상적 또는 비임상적 데이터가 필요한지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론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넷째, 사용자 및 규제 당국에 대한 투명한 정보 제공 의무가 강화돼야 합니다. 어떤 변경이 이루어졌는지, 그 변경이 제품의 성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정보를 사용자와 규제 당국에 명확하고 시기적절하게 제공하는 절차가 마련돼야 합니다.
구체적인 제도적 보완은 디지털 임상시험의 데이터 신뢰성 확보를 통해 의료 기술 발전에 다음과 같은 세부적인 이점을 가져올 것입니다.
첫째, 정밀 의료의 실현을 가속화합니다. 고품질의 신뢰성 있는 데이터를 기반으로 머신러닝 기반 의료기기가 더욱 정교하게 환자 맞춤형 진단 및 치료를 제공할 수 있게 됩니다. 이는 개인의 유전적 특성, 생활 습관, 의료 기록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한 최적의 치료법을 제시하는 데 기여합니다.
둘째, 희귀 질환 및 난치병 진단·치료 접근성 향상에 기여합니다. 디지털 임상시험은 지리적 제약 없이 소수의 환자로도 효율적인 임상시험을 가능하게 하며, 정밀하고 신뢰성 있는 데이터는 희귀 질환 및 난치병에 대한 새로운 진단 및 치료법을 탐색하고 개발하는 데 필수적인 근거를 제공합니다.
셋째, 만성 질환 관리의 효율성 증대에 기여합니다. 웨어러블 기기 등을 통한 실시간 데이터 수집 및 분석은 만성 질환 환자의 상태 변화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질병의 악화를 미리 예측하여 선제적인 개입을 가능하게 합니다. 이는 환자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고 의료비 부담을 줄이는 데 기여할 것입니다.
디지털 임상시험 시대의 데이터 신뢰성 확보는 단순히 기술적 역량 강화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식약처의 선제적인 노력에 발맞춰, 기술 혁신을 뒷받침하는 더욱 정교하고 실용적인 제도적 틀이 뒷받침되면 디지털 의료의 무한한 잠재력을 온전히 실현하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입니다.